그가 만든 책은             - 송 찬호 -
 

    그가 만든 책은 벽돌보다 더 무겁네 책의내부는 어
둡고 축축하다네 책의 표지에 끼워넣은 유리창은 그 책
을 들여다보기 위해 만든 작은 창문이었던 것 언젠가 그
책 한번 기웃거렸네 벽에는 스스로 등불이었던 자들이
휘갈겨 쓴, 누군가, 이 책은 유황 냄새가 난다, 고 씌어
있었네 유리창은 노랗게 동상이 곪아 흘러내렀네 죄의
열차를 타기 위해 먼 길을 지친 행렬이 느릿느릿 걸어나
왔네 아직 공장은 어렸네 공장의 그 가느다랗고 여윈 굴
뚝이 검은 연기를 한 줌씩 집어올렸네 그 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네 빛으로부터 추방된 흰 종이와 안경뿐인
먼지의 방 매서운 겨울을 피하여 누군가 한철을 쉬어가
곤 했다네 지하의, 인쇄소에 내려가 무거운 납덩이가 되
어 올라오곤 하였네 등 구부러진 의자가 오직 그의 위안
이 되었네 쉼 없이 발걸음 서성거렸네 이 세계는 변화할
것인가, 일생을 두고 감옥을 읽고 간 자의 기록 그 책
참으로 오래 살았네 도서관 가는 길이 긴 장례식이었네
惡貨가 평생 그의 뒤를 쫓았네
 
 

(1994)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 서 정주 -
 

그 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 위에 이고 오는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 갓의 물방울이 그 애의 이마에들어 그 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는
그 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동이의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조심해 걸어와서 내 앞을 지날 때는 그 애는 내게 눈을 보내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소리 없이
웃었습니다. 아마 그 애는 그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엎지르고 걸을 수 있을 때만
나하고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것이겠지요.
 
 

(1975)
 
 
 
 
 
 

날개시장       - 이 승훈-
 

  날개 시장엔 날개만 판다 비둘기 날개 까치 날개 제비
날개 잠자리 날개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래 네가 찾고
있는 선녀 날개 난 나무꾼이니까 넌 선녀야 그러나 넌 날개
를 사면 안 돼 날개를 사면 나를 버리고 하늘 나라로 날아
갈 테니까 난 너 없이 하루종일 나무나 패며 살긴 싫어 그
러니까 날개 시장을 폭파해야지 불을 질러야지 시장 주인을
경찰서에 고소해야지 그러나 아니야 오늘 밤엔 이상해 나도
날개 시장엘 가고 싶어 나도 너처럼 날개를 달고 하늘 나라
로 가고 싶으니까
 

(1995)
 
 
 
 
 
 

性                - 김 수영 -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憐憫의 순간이다 恍惚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난 뒤에도 보통때보다도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1986. 1.9)
 
 
 
 
 
 

엄마, 애비없는 아이를 낳고 싶어      - 박 서원 -
 

엄마, 애비없는 아이를 낳고 싶어
가로등 밑으로 머리숱 많은 여자가 지나가고
하얀 자동차 세워진 도로에서
엄마, 애비없는 아이를 낳고 싶어
모든 게 진실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욕되겠어
싸울 게 없는 일방통행인 우리는 얼마나 불행하겠어 때로는가식이 필요해
엄마, 아직 이른 새벽에 부슬비 오는데
이빨을 갈며 불온한 서적을 태우고 바로 당신이었던 육체에세계를 심겠어 아이를 낳겠어 술을 마시면 더욱 맑아지는 정신으로 나만의 몫이었던죄와 폭발만 살찌는 불바다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애비없는 아이 하나 낳겠어
은구슬 금구슬 꽃따라 철따라 피어나는 백모란 밤바다 꿈마다피어나는 가시밭
흥분한 채로 겨울의 찬공기 달려가며
등에 난 내 혹을 키우겠어
검은 비옷을 입고 소름을 키우며
모든 걸 부정하며 그토록 충실하려 드는 세계 악마의 휘발유아아 살해하면서
애비없는 아이 하나 낳겠어
천 갈래의 길을 묶어
비참할수록 평온한 일생의 아이

엄마, 비틀거리는 강산 비틀거리는 조국 방방곡곡 팔 다리가가느다란 사람들
청천벽력 종려나무 참나무 아래
엄마, 애비없는 아이를 낳고 싶어 모욕을 받고 싶어 만일모욕이 없다면 우리의 나날은 얼마나 지루하겠어 때로는 잃어버린 고통을 찾아나서야 해
엄마, 아직 깊은 겨울 눈은 내리는데
한 계절 동안 핼쓱했던 얼굴을 벽에다 짓이기며
바로 당신이었던 세계에 경멸을 심겠어 아이를 낳겠어 엄마,은방울 금방울 아직은 순결한 종소리 용기와 열정이 빨아먹을 수록 말라가는하늘 아래 망가진 인형을 꿰매며
어두워지면 한껏 타오르는 난로에 양은 주전자 가득 물을끓이고 마약보다 화려하게 가랑이를 벌리고 악을 쓰며 애비없는 아이 하나 낳아보이겠어
저녁 정거장에 쭈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껌을 씹던 나의 그리운형제 곱지않은 피부, 등에 짐을 지고 떠나는 사람들 두고 두고
살껍질을 벗기고 뼈를 갈구며
병든 밭을 일구는
커다랗게 커다랗게 탄생하는 붉은 혀의 아이를
 

(1990)
 
 
 
 
 

詩第十三號  (오감도)       - 이상 - 
 

내팔이면도칼을든채로끊어져떨어졌다. 자세히보면무엇에몹시威
脅당하는것처럼새파랗다. 이렇게하여잃어버린내두개팔을나는燭臺세
움으로내방에裝飾하여놓았다. 팔은죽어서도오히려나에게怯을내
이는것만같다. 나는이런얇다란 禮儀를花草盆보다도사랑스레여긴
다.
 

(1934)
 
 
 
 
 
 

처용단장 (2부 들리는 소리)   - 김 춘수
 

불러다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말더듬이 一字無識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불러다오.
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황토현에서 곰나루까지      - 정 희성 -
 

이 겨울 갑오농민전쟁 전적지를 찾아
황토현에서 곰나루까지 더듬으며
나는 이 시대의 기묘한 대조법을 본다
우금치 동학혁명군 위령탑은
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가 세웠고
황토현 녹두장군 기념탑은 전두환이 세웠으니
광주항쟁 시민군 위령탑은 또
어떤 자가 세울 것인가
생각하며 지나는 마을마다
텃밭에 버려진 고추는 상기도 붉고
조병갑이 물세 받던 만석보는 흔적 없는데
고부 부안 흥덕 고창 농투사니들은 지금도
물세를 못 내겠다고 아우성치고
백마강가 신동엽 시비 옆에는
반공순국지사 기념비도 세웠구나
아아 기막힌 대조법이여 모진 갈증이여
곰나루 바람 부는 모래펄에 서서
검불 모아 불을 싸지르고
싸늘한 성계육 한점을 씹으며
박불똥이 건네주는 막걸리 한잔을 단숨에 켠다
 

(1989)